SCP 8

[괴담][파라워치]저녁 여덟시 반에 목욕하지 마라

우리 집에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규칙이 있다. 「저녁 여덟시 반에 목욕하지 마라」는 것. 어째서인가. 아버지나 엄마한테 이유를 물어본 적도 있지만, 잠자코 있을 뿐 가르쳐 주지 않는다. 부모님 뿐만이 아니다. 내 친척 인간들은 모두 저녁 여덟시 반에 목욕을 하지 않는다. 친척이 마누라나 남편을 데려와 가족에게 소개하면, 가장 먼저 목욕 시간 이야기를 할 정도다. 다만 의외로 조건은 느슨하다. 여덟시 반에 자기 집의 욕실에 들어가 있지만 않으면 된다. 즉, 8시 29분 59초까지 욕실에 들어가 있어도 되고, 8시 30분 1초에 욕실에 들어가도 된다. 이렇게 느슨하기도 해서, 점차 신경을 안 쓰게 된다. 지키기도 간단하니까. 저녁 먹는 시간이 습관화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잊어버리고 어긴다 하더라도, ..

[괴담]헤어짐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어젯밤,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 이제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 재산을 쏟아 부은 사업이 망하니 먼저 돈들이 나를 떠났고, 직원들이, 친구들이,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이 나를 떠났다. 부모님들은 진작 세상을 떠나셨다. 사업이 성공하면 모셔오려고 했는데… 이 집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집세를 낼 수 없으니 한 달 안에 이 집에서 떠나야 했다. 아니, 집이 나를 떠나는 건가? 뭐가 됐든 간에 있을 곳이 없어지는 것은 똑같았다. 과연 내게서 더 떠날 것이 있을지 집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고민하고 있으니 오늘따라 텅 빈 집이 더욱 허전해 보였다. 벽도, 문도, 창문도, 그리고 얼마 없는 최소한의 가구들도, 오늘따라 멀어 ..

[괴담][무진기담] 이 또한 지나가리라

부서져버려라. 이런 곳 같은 건 부서지는 편이 좋다. 산산이 조각나서 그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끔 철저히 망가뜨릴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백색소음과도 같이 머리속 한 모퉁이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내게 저주와 절망을 토해냈다. 피 끓는 외침은 아니었지만, 정맥을 은근히 달이는 욕설이었다. 이 도시의 하늘은 늘 찌푸린 회색과 백색의 안개 뿐이었다. 이 안개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런던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가 본 적은 없어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들의 햇빛을 가린 건 구름이지 안개가 아니기에, 언젠가 분명히 햇살을 볼 수 있을거란 희망이 있다. 이 곳에는 그것이 없었다. 이 곳은, 이 곳은 어느 때에 와도 똑같았다. 아아. 안개는 느릿하게 반복되는 드럼의 박자처럼 사람의 정신을 깎아낸..

[괴담][무진기담] 유다의 마을

이제는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다. 때는 바야흐로 1970년, 가발공장으로 꽤나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던 아버지는, 중화학 공업으로의 급속한 체제 전환에 따른 낙오자가 되어 파산했으면 그래도 가오는 살았겠지만, 그저 평범한 사기에 의해 돈도 잃고 공장도 잃고 집도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부모님은 쪽방으로 쫓겨가 악착같이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며 동시에 빚까지 갚아야 했고, 이제 겨우 열 살을 넘었던 나는 그 생활양식을 유지하기에 거치적거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댁으로, 남동생은 친할머니댁으로 보내졌다. 외할머니를 그전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것은 분명 아닐텐데, 열 살 이전의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나는 외할머니가 사는 동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건 외할머..

[괴담][무진기담] 짙은 안개

집 안에는 내가 서있었고, 문 밖에는 짙은 안개만이 떠다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때문에 문을 열었지만, 문 밖 어디에도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그저 짙은 안개만 끼어있을 뿐이었다. 나는 모처럼 짙은 안개가 낀 날이라 마을 아이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 생각하고 별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렸다. 다급한 듯이 강하게 여러번 내리치는 소리가 말이다. 나는 바로 달려가서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때 2시간 전의 일 때문인지 짙은 안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기시감이 느껴져 잠시 머뭇거렸다. 잠깐의 고민끝에 나는 문 손잡이를 빠르게 돌려 문..

[괴담][무진기담] 그 비오는 날, 눅눅한 방울 소리, 무진과 곡성 그 사이의 안개 없는 폐촌에서

벌써 2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래 가방 하나만을 등에 지고서 이곳저곳을 떠돌며 여행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져 울적했던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길을 거닐다가 지쳐 잠시 외딴 곳에 위치한 낡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은 사람 하나 없는 폐촌과 가파른 산 사이에 껴있어 이런 곳에도 버스가 다니는구나 하며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잠시 의자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졸음이 제 몸을 끈적하게 휘감았습니다. 그 찝찝한 졸음 때문에 저는 결국 순식간에 곯아떨어져 해가 산봉우리에 걸려 넘어가기 직전에 눈을 떴습니다. 폐촌과 산 가운데에 홀로 서있는 상태에서 유일하게 절 지켜주었던 햇빛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

[괴담]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꽤나 오래된 이야기일세. 한 남자가 있었다네. 돈은 부족했지만, 가난하지 않았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밭 몇 뙈기가 있었고, 그걸 경작할 농기구도 있었고, 농작물을 잘 기를 기술도 있었어. 농촌의 평범한 사람이었네. 길을 걸어가면 하루에도 수십번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네. 그는 아침이면 밭에서 밭을 갈았고 저녁이면 집에 돌아와 잠을 잤지. 그렇게 수 년을 밭에서 살았네. 조금은 진부한 도입부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밭에서 항아리를 하나 발견하게 되네. 항아리에는 한자가 새겨진 기이한 부적과 함께, 알지 못할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 온통 먹인지 흙탕물인지 모를 검은 무언가 범벅이기도 했지만 말일세. 그는 한자를 읽지 못해서 부적에 뭐라고 쓰여있는지는 몰랐지만, 항아리가 꽤나 무겁다는 ..

[괴담][무진기담]몽유무진

내가 나고 자란 무진을, 이제 떠나려 한다. 한 마디로 무진, 이라 해도 이런저런 곳이 있다. 저 산자락의 찾는 사람 적은 마을부터 저어기 남쪽의 도심, 거기서 다시 산 너머의 작은 포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나가는 섬 몇 개까지, 무진시는 지금껏 그 크기를 키워왔다. 내가 태어난 곳은 굳이 말하자면 무진의 바다라고는 조금도 안 보이는 산자락의 마을 쪽으로, 내가 태어나기 십 년 전쯤 무진시로 편입된 곳이다. 그 마을은 젊은 사람이 드문 농촌으로, 무진 시내까지는 비포장 도로인 탓도 있겠지만 차로 꼬박 30분 이상 걸리는 곳이었다. 마을 풍경은 누구나가 시골 마을 하면 떠올릴 풍경이었고, 다만 누가 무진 아니랄까봐, 매일 새벽 안개가 끼는 것만이 특이했다. 마을 중앙에는 큰 느티나무, 마을 입구에는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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