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버려라. 이런 곳 같은 건 부서지는 편이 좋다. 산산이 조각나서 그 흔적마저 찾을 수 없게끔 철저히 망가뜨릴 것이다. 이곳에 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백색소음과도 같이 머리속 한 모퉁이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내게 저주와 절망을 토해냈다. 피 끓는 외침은 아니었지만, 정맥을 은근히 달이는 욕설이었다.
이 도시의 하늘은 늘 찌푸린 회색과 백색의 안개 뿐이었다. 이 안개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런던도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가 본 적은 없어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들의 햇빛을 가린 건 구름이지 안개가 아니기에, 언젠가 분명히 햇살을 볼 수 있을거란 희망이 있다. 이 곳에는 그것이 없었다. 이 곳은, 이 곳은 어느 때에 와도 똑같았다. 아아. 안개는 느릿하게 반복되는 드럼의 박자처럼 사람의 정신을 깎아낸다. 햇살은 이따금씩 구름 뒤에서 흐릿하게나마 노란색 잔광을 흩뿌릴 뿐이다. 파도소리는 무관심하게 바위에 부딪혀 사라진다. 같은 노래를 수십번 다시 듣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사표를 내고 떠났어야 했다. 먹여살릴 가족도 없는 주제에 무슨 호기로 발령을 받았단 말인가. 무진에 내가 왜 왔을까. 좌천이라고 생각하고, 사직서를 부장의 얼굴에 집어던졌다면 적어도 이것보단 나은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5년동안 나는 도시가 아니라 감옥 속에서 살았다. 내가 어디를 가던지 내 등줄기를 핥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안개다. 안개가 틀림없다. 안개가 날 감시했다. 도시 전체가 날 적의에 차 지켜본다는 뜻이다. 이건 허풍이 아니다. 한적한 번화가의 거리에도, 음습한 뒷골목의 아침에도 안개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진을 떠나는 그 순간에 날 덮치겠노라 선언하며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리하여 발이 묶였다. 자유를 빼앗겼다. 도시는 나를 고문하고 속박했다. 그래, 심지어 명절에도 고향에 쉬이 갈 수 없었다. 고속도로를 타고 무진시 바깥을 나갈 때면, 항상 안개에 취해 서로 들이박은 차량들이 내 앞을 막았다. 귀경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들은 사라지고 안개만이 내 옆에 있었다. 비어버린 4차선 도로에 안개만이 가득 찼던 것이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걸 바라보며, 한심하게도 '이미 전출을 왔으니 어쩔 수 없다' 하는 핑계를 대었었다. 내 손과 내 발로 지옥의 아가리에 걸어들어갔다.
아아, 어째서 나는 그렇게나 어리석었던가. 날씨에 의지가 없다고 확언하며 지내던 날은 채 3년을 못 갔다. 그건 내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안개가 짙게 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면 안개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꼈다. 오늘은 좀 덜 했으면 좋겠는걸, 하면 그나마 앞이 보일 정도로는 개었다. 그러나 절대로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혹시나 무진 외곽으로 차를 몰고 가기라도 하면 빽빽하게 눈 앞을 가로막았다. 가지 말라는 탄원이었다. 이사하려고 서류를 인쇄했을 때에는, 사무실에서 차에 도착하는 사이에 서류가 물을 먹어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래. 그 중에 가장 소름끼쳤던 건 차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더니, 차 키가 갑자기 녹슬었을 때다.
부서지기 전에는 밖으로 향할 수 없다. 방향은 오로지 안, 안 뿐이다. 더 깊게, 더 중심으로. 안개가 또아린 빌딩 더미들 사이로 컨베이어 벨트에 밀려가듯 끌려간다. 무진에 들어오는 자는 있어도 나가는 자는 없다.
그걸 견디지 못하고 안개에 홀려버린 자들도 있었다. 정신력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하나 둘 빈 술병을 옆에 놔두며 부서져갔다. 무진의 하천에 떠오르는 시체가 어디 하나 둘인가. 하하. 안개가 그래서 그들을 모독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목을 맨 자는 여지없이 흠뻑 젖은 채로 발견되었다. 매스컴에서는 그걸 무진의 유별난 습기가 일으킨 현상이라고 보도하곤 했었다. 습기, 습기라고? 습기로 보이나? 안개가 집어삼키고 남은 껍데기에 묻은 건 습기가 아니라 물기다. 괴물이 이빨로 갈가리 찢어버린 후에, 희생자의 시체에 남은 침인 것이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사온 소주병이 미끌거리는 몸에 부딪힌다. 텅 빈 빌라, 아무도 오지 않는 건물에 들리는 건 병이 부딪히는 소리 뿐이다. 쨍, 쨍, 쨍… 계단 아래로 굴러가는 녹색 유리병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도착했다. 깨지지 않았다. 안개는 여전히 나를 문 바깥에서 호시탐탐 지켜보고 있었다. 틀려. 나는 네게 지지 않겠다. 다시는 너에게 돌아가지 않을 거야.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남은 소주병을 들어 몸에 부었다. 성냥이 젖지 않게 주의하며.
술과 기름에 젖을 대로 젖은 몸이니 조금의 불씨만 있어도 불타오를 게 뻔하다. 둘 다 몸에만 부었을 뿐,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기에 정신은 변함없이 또렷했다. 손은 흔들려도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왼손으로 성냥갑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로 연신 성냥을 그어대었다. 대여번 어깨를 붙잡고 말리던 습기를 뿌리치자, 불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성냥 끝자락에서 중간으로, 다시 반대편 끝으로. 느릿하게 움직이던 화염은 손가락 끝에 닿자마자 빠르게 몸에 옮겨붙었다.
고통스럽다. 고통 사이로 이렇게 끝을 내는게 옳지 않다는 회한이 스며든다. 마치 내가 패배하기라도 했다는 듯 귓속에 속삭인다. 하지만 이건 내가 지는 게 아냐. 하하. 안개는 불에 활활 타서 사라질 거다. 불길은 도시의 안개를 집어삼키고 날 자유케 할 거야.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안개가 겨우 성냥 한 조각에 흔적도 없이 부서진다! 무진아, 무진아! 얼마나 우스운 광경이냐! 인간이 위대한 줄 모르고 한낱 안개가 으스대는 꼴을 좀 보란 말이다! 하하… 하하하하! 아악! 아아아악!
신문사는 교외 빌라가 여전히 불타고 있다는 기사를 신문에 냈다. 시민들은 내일 아침에도 안개가 짙게 낄 예정이라는 예보를 들으며 감흥 없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소방차에서 속절없이 뿜어지는 물을 몸에 뒤집어 쓴 건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잦아드는 불길에서 나온 하얀 연기는, 안개 속에 섞여 들어가 천천히 사라졌다. 이내 연기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출처: SCP 재단 한국어 위키 (by ZaWoo)
라이선스: CC BY-SA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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